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영삼/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문단 편집) === [[김대중]]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kgnews.co.kr/208184_32055_4218.jpg|width=100%]]}}}|| [[삼김시대]]의 한 축. 김대중과는 최고의 동지이자 라이벌. [[적이 된 아군|사이 좋을 때는 등 뒤도 맡길 수 있는 누구보다 든든한 전우였고 나쁠 때는 이렇게 사이가 나쁠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원수라도 진 마냥 죽일듯이 싸워댔다.]] 1987년 민주화 이전까지는 대체로 협력관계였다면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대립, 적대관계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돈이 많은 부잣집아들이었고 온건한 의회 민주주의자였고 모친이 공산주의자에게 죽었고 기독교 (개신교 교회 교인)이었고 전통야당(신익희 조병옥)에서 성장한 보수정치인이었던 반면, 김대중은 자수성가한 사업가, 언론인 출신이며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다. 정치 계보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민주당의 계파에서 김대중은 장면 신파의 적자로, 김영삼은 조병옥 구파의 적자로 자리잡아 정치 세력을 이끌었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에 대항할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1차 투표에서는 김영삼이 이겼으나, 과반이 안 돼서 다시 한 2차 투표에서 김대중이 승리하며 김대중이 대선 후보가 되었는데, 김영삼은 결과에 승복하며 '김대중 후보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이기 때문에 김대중 후보의 선거를 적극 돕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대중]]이 사실 이때 3등 후보였던 [[이철승]]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서 후보 당선이 유력했던 [[김영삼]]을 이기게 된 것인데, 김영삼은 고민 끝에 김대중을 돕기로 하였고 김대중의 당선을 위해서 열심히 선거를 뛰었다. 이후 두 사람의 신민당 내 입지상 서로 맞서는 위치에 서서 대결하기도 했으나,[* 김영삼은 70년대에만 신민당 당수를 두 번이나 지내는 등, 당내 주류의 위치를 놓친 적이 없으나, 김대중은 신민당 당수를 지내 본 일이 없음은 물론이고, 87년에 평민당 당수를 지낸 것이 첫 당수직일 정도로 야권 내 비주류였다.] 궁극적으로 두 사람이 지향하는 바는 동일했다. 5공에서도 역시 온갖 정치 탄압과 규제를 받으면서도 협력하여 민추협을 만들고 신한민주당을 창당하는 등 민주화 운동의 정계 구심점으로 맹활약했다. 이들의 성격을 나타내는 일화로 80년대 민주화 운동 당시 김영삼이 제안한 '''범국민 천만 서명 운동'''이 있다. 이때 김대중은 '정권의 감시가 서슬퍼런데 현실적으로 천만이 가능하겠냐’며 ‘백만도 어려운데 그냥 백만 서명 운동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김영삼은 '어차피 둘 다 안 될 거면 통 크게 천만 지르자'고 설득해 결국 천만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혹은 김대중이 "인구가 몇 명인데 천만 명을 받아?"라고 하자 김영삼이 "그걸 세리(헤아려)보나?"라고 맞받아 쳤다고 한다.] 어쨌든 이들을 포함한 민주화 인사들의 노력으로 한국은 민주주의의 희망을 가지며 전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노력의 결실인 1987년 대선에서 둘의 단일화가 실패하면서 사이가 완전히 멀어졌고, 전두환의 친구이자 신군부의 2인자였던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어부지리로 당선되고 만다. 이 때 상도동계에서는 1971년 대선에 YS가 양보해주었는데 1987년에 DJ가 독자 출마한 것에 대해서 두고두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으로 별도의 노선을 굳히게 된다. 특히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90년 [[3당 합당]]을 하자 그 둘의 간격은 더욱 더 벌어지게 되었다.[* 이 당시의 [[3당 합당]]도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오가나 대다수 사람들이 "그때 같이 통합하면 좋았을걸...!"라는 생각이 대다수다. 이로 인해 민주화 운동을 같이 하던 세력들이 갈라져 버리는 바람에 아쉬워하는 부분. 참고로 노태우는 원래 김대중에게 먼저 합당 제안을 했고 김대중도 긍정적으로 검토했다가 당시는 5.18의 여파가 크게 남았던 터라 무산되었다.][* 사실 13대 대선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의 지지층은 이미 상이한 성격을 보였던 탓에 결국은 같이 갈 수 없었던 면은 있다. 다만 3당 합당으로 호남 고립의 지역구도가 만들어진 것이 지금까지도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그 후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권을 차지한 김영삼은 아이러니하게도 1997년 대선에서 다음 정권을 김대중에게 넘겨주게 된다.[* 당시에는 김영삼이 신한국당 대선후보인 이회창과 갈등이 심했던지라, 이인제의 독자 출마를 용인하고 선거 중립을 선언하는 등 김대중의 당선을 암묵적으로 지원해준 측면이 있다.] 이때 차남 김현철에 대한 김대중 정부의 사면[[복권#s-2]][*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1997110400341|보석 석방]]으로 징역에서는 석방된 상태였다.]이 거론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는 듯 했으나, [[http://news.joins.com/article/3806985|여론]]을 거스르지 못한 DJ는 자신의 임기 동안 김현철 씨의 사면 카드를 꺼내지 않았다. 김현철 씨의 사면이 이루어진 것은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89597.html|노무현 정권 말인 2007년]]. 둘의 관계는 YS가 김대중에 대해 '내 뒷조사를 엄청 한다'거나,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당시 "노벨상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라 비난했을 만큼 거리가 먼 상태였다. 2003년 [[대북송금 특검]] 때는 "이적행위로 국민을 핵위기 속으로 몰아넣은 김대중씨는 마땅히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며 사법처리돼야 한다"고 하였다.[[https://www.yna.co.kr/view/AKR20151122005451001|#]] 김영삼은 이후 DJ가 서거할 때까지 두고두고 DJ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2000년 6월 전직 대통령 입장으로 김영삼이 청와대 오찬장에 들어섰을 때 김대중은 화해를 요청했지만 YS는 IMF 문제에 대해서 먼저 사과하지 않으면 화해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거절했고, 김대중 역시 더이상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양 진영 간에 사이가 급격하게 벌어졌던 1987년 대선 이후 치러진 1988년 총선에서 등원한 [[평화민주당]]과 [[통일민주당]] 의원들은, 서로 팽팽하게 경쟁을 하였다. 제5공화국 시절의 비리를 추궁하는 [[청문회]]에서는 갓 등원한 [[노무현]]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이 예리한 질문을 던지며 [[전두환]] 및 비리 기업인들을 몰아붙이는 모습을 본 [[김대중|DJ]]가 노무현 의원을 극찬하기도 했다.[* 평민당 의원들에게도 본받으라는 말을 했다는 후문.] 그 뒤로 YS가 'DJ와 노무현은 공산주의에 가까운 정권, 나쁜 정권으로, 나중에 처벌받을 것이다', 'DJ는 내가 광주로 유세를 가면 깡패를 동원한 나쁜 사람이다', '거짓말만 한다', 'DJ는 빨갱이다' 등 2000년대 들어서도 발언을 했다. 다음은 DJ정부 출범후 지난 4년간 YS가 한 반(反)DJ 독설 가운데 정책 및 상황인식에서 DJ와 크게 차이나는 주요 대목을 정리한 것이다. 많은 부분에서 YS의 자기합리화와 궤변이 읽힌다. 그러나 곳곳에서 YS의 확고부동한 신념도 읽을 수 있다. [[https://m.pressian.com/m/pages/articles/22899#0DKW|#]] 김대중은 [[감옥]]생활 6년을 했고, 김영삼은 군사정권시절 [[서대문형무소]]에 20일간 간것이 전부다. 또 김대중은 과격하다는 말을 들은반면 김영삼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의회민주주의자라는 평을 받았다. 이는 김영삼의 투쟁방식은 강경했으나 정치성향은 온건보수쪽이었고 정부여당인사들에게조차 속임수를 쓰지않았다는 것이 인간적인 신뢰감을 주었다. 김대중은 군사정권에서 수난,탄압을 많이 겪었고 김영삼은 김대중에 비해 탄압을 덜 겪었다. 김영삼이 [[김대중]], [[노무현]]정부의 햇볕정책을 반대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2000년대]]에도 티격태격하던 둘의 사이는[* 정확히는 YS가 DJ에게 일방적으로 독설을 퍼부은 것이지만.] 결국 2009년 위독하여 사경을 헤메는 김대중에게 김영삼이 병문안을 가면서 말년에서야 [[화해]]의 움직임으로 나아가게 된다. 당시 병문안을 마치고 나온 김영삼이 "김대중 대통령하고 나하고 관계는 6대 국회부터 동지적인 관계에 있었고, 오랜 동지적인 관계로 있었지만, 경쟁 관계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입니다. (기자들이 두 분이 화해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냐고 묻자) 그렇게 봐도 좋죠. 이제 그럴 때가 된 것도 아닙니까?"라고 언급한 것이다. 이때 김대중은 의식이 없었지만 김영삼은 김대중의 아내 [[이희호]]를 위로했고, 김대중 사망 후 측근인 동교동계 정치인들을 찾아가 위로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며 양 계파 간 화해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이후 2015년 김영삼이 사망했을 때, 동교동계 정치인들이 조문을 오고 상도동계 정치인들을 위로하면서 화합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여야의 핵심 정치인이었던 김무성과 박지원이 사적으로 교류가 많았던 사이라 이들을 통해 어느정도 접점이 만들어질 수 있었는데, 김영삼의 유언대로 통합과 화합이 이뤄진 셈이다.] 15대 대선이 끝난 1997년 12월 20일, [[김영삼]]대통령은 이 대선에 대해 "'''어려움 속에서 선거의 명예혁명을 이뤄낸 국민들의 용기와 지혜에 경의를 표한다. [[김대중]]당선자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며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 힘을 모아 협조하자"'''는 성명을 발표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7122000209101012&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12-20&officeId=00020&pageNo=1&printNo=23743&publishType=00010|선거 명예혁명을 이룬 국민들 지혜와 경의, 1997.12.20 동아일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7122000209102013&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12-20&officeId=00020&pageNo=2&printNo=23743&publishType=00010|김대통령 담화 의미 1997.12.20 동아일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